불볕에 따고 불통에 찌고 "담배농사가 끝판왕 맞네" - 한국일보(2020.07.27) > 보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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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볕에 따고 불통에 찌고 "담배농사가 끝판왕 맞네" - 한국일보(2020.07.27)

작성일2020-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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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기자, 잎담배 수확 체험해 보니
7, 8월 수확기.. 무더위에 숨이 턱턱
잎담배 내뿜는 니코틴에 어질어질
건조기에 넣고 뜨거운 바람에 말려
수입량 늘고 금연 정책에 농가 시름
안정적 수입에도 재배면적 20분의1로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얼핏 보면 커다란 쌈 채소 같아서 친근감마저 느껴졌다. 하지만 보기보다 독한 녀석이란 걸 깨닫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담배 원료인 잎담배 얘기다.

보통 가을에 거둬들이는 다른 작물과 달리 잎담배는 숨이 턱턱 막히는 한여름에 수확한다. 잎을 따는데 기계의 힘을 빌리기도 어려워 일일이 사람 손길이 들어가야 한다. 밭농사 중 가장 힘들다고 꼽히는 이유다. 최근엔 몸만 힘든 게 아니다. 흡연인구 감소와 저렴한 수입산 잎담배 유입으로 국내 잎담배 농가는 점차 설 자리를 잃고 있다. 잎담배 재배 농민의 평균 연령은 60세가 넘는다. 이들이 낫을 내려놓고 나면 국내 잎담배 농사는 역사책에만 남지 않을까. 잎담배 농사 현장을 서둘러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던 차에 기회가 찾아왔다.

지난 17일 강원 원주시 귀래면의 잎담배 농가를 찾아 수확 체험에 나섰다. 이날 원주 지역 낮 최고 기온은 30도였지만 농민들은 “이 정도면 시원한 편”이라며 밭으로 향했다. 농사 문외한인 기자의 눈에 잎담배는 잎이 넓은 상추나, 녹즙 재료로 쓰이는 케일과 비슷한 모양새였다. 하지만 성인 남성 어깨 높이에 60~70㎝나 되는 잎 크기는 보통 놈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했다. 잎은 줄기를 빙 둘러 높낮이를 달리 하며 18~20개씩 돋는데, 이런 담뱃잎을 따서 가공하면 담배 제품(궐련)이 된다.

이날 작업은 담뱃잎 가운데 ‘중엽’ 수확. 담배잎은 돋아 난 높이에 따라 밑에서부터 하엽, 중엽, 본엽, 상엽 네 단계로 나뉜다. 단계별로 익는 시기와 품질이 달라 한두달에 걸쳐 하엽부터 차례대로 딴다. 2대째 잎담배 농사에 종사하는 밭 주인 신운섭(56)씨는 “가장 아래 있는 잎부터 두세 장, 잘 익은 것만 따면 된다”고 기자에게 요령을 일러 줬지만 말처럼 쉽지 않았다. ‘잘 익은 잎’은 연두색에 가깝고 축 처진 반면, ‘덜 익은 잎’은 짙은 초록색에 빳빳하다는데, 이런 미묘한 차이를 초보자가 구분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나마 잎을 따보면 느낌이 조금 왔다. 잘 익은 잎은 “똑 똑” 경쾌하게 줄기에서 분리가 됐지만, 덜 익은 잎을 따면 “지익”하며 줄기가 딸려오는 둔탁한 느낌이 났다.

잎이 땅에서 '겨우' 10~30㎝ 높이에 있어 몸을 더 움직여야 한다. 잎의 얼마나 익었는지 확인한 뒤 따려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밭에 얼굴을 파묻을 정도로 허리를 완전히 굽혔다 펴는 동작을 반복해야 했다. 몇 개 따지도 않았는데 벌써 허리와 무릎이 저려왔다. 한 이랑의 담뱃잎을 다 딸 때까지 묵직한 담뱃잎 수십장을 가지런히 정돈한 채 품에 안고 다녀야 했는데, 그래야 이어지는 건조 작업 때 담뱃잎을 정돈하는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생잎에선 길거리에서 흔히 맡을 수 있는 매캐한 담배 연기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담뱃잎이 내뿜는 끈적한 니코틴 진액이 “나 담배요”라며 자신의 정체를 상기시켰다. 울창한 밭고랑을 해치며 걷다 보면 이런 진액 때문에 누가 붙잡는 것마냥 저항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고랑을 몇 번 오가니 진액과 흙먼지가 엉겨 붙어 옷과 장갑이 금새 지저분해졌다. 그래도 이런 진액은 농가에 반가운 존재이다. 잎에 진액이 많이 차있을수록 건조 후 무게가 많이 나가서 상품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고농도 니코틴 탓에 ‘담뱃잎 농부병’ 증세

잎담배가 내뿜는 고농도 니코틴은 호흡기와 피부를 통해 인체에 흡수될 수 있다. 니코틴 과다 노출로 농민들이 어지럼증이나 구토, 오한, 불면증을 호소하는 건 드문 일이 아니다. 금연 4년차인 기자도 밭일을 체험한 날 저녁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가벼운 두통을 겪었다.

비 오는 날이나 이슬 맺힌 새벽에 밭일을 하면 니코틴이 물에 녹아 작업자 피부로 쉽게 흡수돼 증세가 더 심각해질 수 있다. 심한 경우 이틀씩 잠을 못 이루는 경우도 있지만, 흡연자는 니코틴에 익숙한 탓인지 증상이 거의 없다는 게 농민들의 설명이다.

이런 증세는 ‘담뱃잎 농부병’이라고 불리며 세계적으로 잎담배 농가의 직업병으로 인정된다. 국내에는 경북 청송군 잎담배 농가를 조사했더니, 농민 3분의 1 이상(37.5%)이 담뱃잎 농부병 증상을 보였다는 2014년 연구 결과(박성준 박사의 동국대 의대 박사학위 논문)가 있다. 잎담배 밭과 건조 작업장의 공기를 채취해 사무실 및 PC방 흡연실의 니코틴 농도와 비교한 결과, 밭의 니코틴 농도가 흡연실의 1,000여배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됐다. 또 잎담배 밭의 니코틴 농도는 고용노동부가 정한 화학물질 노출 기준(1㎥당 0.5㎎)의 100배를 초과했다. 공기 순환이 잘 안 되는 건조 작업장과 공동 건조장에서 검출된 니코틴 농도는 밭보다 더 높아 노출 기준의 600~1,000배로 나타났다. 다만 니코틴 노출이 단기 증상 이외에 사망 등 치명적 재해로 이어진 사례는 거의 없었다.

이날 밭 주인 신운섭씨 이외에도 태국 국적의 외국인 근로자 6명이 기자와 함께 한 밭에서 일했다. 담뱃잎이 닿지 않게 전신을 가린 한 여성 근로자에게 “힘들지 않냐”고 물었지만, 한국말에 서툰 그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농가가 수확철에 새벽 5시부터 오후 4시까지 밭일하는 사람에게 지불하는 일당은 12만원. 코로나19 사태로 외국인 근로자 일손이 부족해 작년보다 1만원 올랐다. 다른 작물은 일당이 남자 10만원, 여자 7만~8만원이지만, 잎담배 수확은 다른 밭일보다 고된 탓에 더 높다고 한다.

담뱃잎 건조기 열리자 대추차 냄새

수확한 잎을 20~30㎏씩 말아 싼 포대들을 트럭에 싣고 담뱃잎 건조장으로 갔다. 사람 키만한 금속 틀에 담뱃잎을 고정하는 것부터 건조 작업이 시작된다. 담뱃잎 수백장을 잎자루 부분이 위로 향하게 금속 틀에 겹겹이 쌓은 뒤, 못이 수십 개 달린 덮개를 덮으면 담뱃잎이 틀에 단단히 고정된다. 이어 30~40㎏ 나가는 완성된 금속 틀을 두 명이 들어 20㎡(약 6평) 넓이의 벌크 건조기 내 거치대에 거는 작업이 이어졌다.

바닥에 뚫린 무수히 많은 작은 송풍구에서 등유나 전기로 데운 뜨거운 바람이 올라와 담뱃잎을 서서히 건조시키는 것이 건조기의 작동 원리다. 36도에서 68도까지 단계적으로 온도를 올리며 7, 8일간 담뱃잎을 건조시키며 뜸을 들여야 담뱃잎 색깔이 누렇게 변해 상품성이 생긴다. 자동 건조기가 도입되기 전인 1970년대에는 2층 높이의 황토 흙벽돌 창고에 층층이 담뱃잎을 건 뒤 장작불을 지펴 담뱃잎을 말렸다고 한다.

말림 작업이 끝난 건조기 문을 열자 바짝 마른 담뱃잎이 노란 얼굴을 드러냈다. 열기와 함께 구수하면서도 단내 섞인, 언뜻 대추차와 비슷한 냄새가 나른하게 퍼졌다. 건조된 잎은 등급에 맞춰 정리한 뒤 압착기에 넣어 포장한다. 여기까지가 농가의 일이다. KT&G는 이렇게 1차 가공된 담뱃잎을 매년 10월경 구입해 추가 가공 과정을 거쳐 제품으로 만든다.

잎담배 농가는 이런 담뱃잎 수확과 건조를 여름 내내 5, 6차례 실시한다. 마지막 잎까지 따고 줄기를 걷어낸 빈 밭에는 콩 등 다른 작물을 심기도 한다. 그러다 이듬해 4월 다시 잎담배를 심는다.

잎담배 농사, 얼마나 벌까

그렇다면 잎담배 농가 수입은 얼마나 될까. 농촌진흥청의 2018년 농산물 소득조사 결과를 보면 재배 면적 10아르(약 300평)당 잎담배 농사의 연평균 순이익은 124만원(총수입 251만원-경영비 127만원)이다. 황색종 종자의 잎담배를 심는 국내 잎담배 농가의 평균 재배 면적은 140~150아르이므로, 한 농가당 수입은 약 1,700만~1,800만원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다른 특용작물의 10아르당 순이익은 오미자 212만원, 참깨 65만원이다. 노지 채소와 비교하면 고랭지 배추(138만원), 당근(149만원), 시금치(151만원) 등과 수입이 비슷하다.

최고의 고수익 작물은 아니어도 잎담배 농사의 명맥은 근근이 이어진다. 평균 연령 60.6세인 고령의 잎담배 농민들이 평생 손에 익은 농사를 갑자기 바꾸기 어려운데다, 다른 작물에 비해 현금 흐름이 안정적인 잎담배 농사의 장점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담배인삼공사가 2002년 민영화 되면서 KT&G로 바뀌었고, 이와 함께 KT&G는 국내 생산 잎담배를 전량 수매해야 하는 의무가 사라졌다. 하지만 KT&G는 농가와의 계약 재배를 통해 사실상 전량 수매 방식을 아직까지 유지하고 있다. 또 KT&G와 엽연초생산협동조합중앙회가 매년 결정하는 잎담배 구입 가격(1㎏당 1만원 안팎)도 안정적인 편으로 농가로서는 판로와 가격에 따른 불확실성을 줄일 수 있다. 신운섭씨는 “계약 재배를 하면 판매 대금의 30%를 미리 선급금으로 받을 수 있고, 다른 농사와 달리 농자재를 사기 위해 빚을 지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2015년 담뱃값이 2,000원 인상된 이후엔 담배 한 갑이 판매될 때마다 5원씩 적립되는 연초생산안정화기금이 도입돼, 농가들은 기금 운용 수익으로 비료 등을 무상 지원 받는다.

엽연초생산협동조합 중앙회 관계자는 “단위 면적당 잎담배 농가 수입은 마늘, 양파와 비슷하고 고추보다 조금 낮은 수준이지만 안정성이 높고, 수확 후 이듬해 파종 전까지 콩 배추 무와 같은 다른 작물을 심어서 추가 수입을 올릴 수 있다”며 “이런 장점 때문에 잎담배 농사를 새로 시작하거나, 재배 면적을 지금보다 늘리고 싶어하는 요청이 꾸준히 있다”고 전했다.


재배 면적, 1970년대의 20분의 1

1970년대 잎담배는 ‘수출 효자’ 품목으로 꼽힐 정도로 전성기를 누렸지만, 지금 재배 규모는 그 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쪼그라 들었다. 엽연초생산협동조합중앙회 통계를 보면 1978년 잎담배 재배 면적은 서울시 면적보다 큰 6만4,410헥타르에 달했다. 그러나 그 뒤 면적이 점차 줄어 지난해에는 20분의 1 수준인 3,308헥타르에 그쳤다. 같은 기간 전국 논밭 면적이 29% 감소에 머물렀던 점을 감안하면 훨씬 빠른 속도로 담배밭이 사라진 셈이다.

잎담배 면적이 줄면서 자연스럽게 농민 수와 생산량도 급감했다. 1978년과 지난해를 비교하면 잎담배 농민 수는 21만5,198명에서 2,880명으로, 생산량은 13만4,349톤에서 1만215톤으로 줄었다.

잎담배 농사가 유독 위축된 이유로는 수입산 잎담배의 높은 가격 경쟁력과 금연 정책에 따른 흡연자 수 감소가 꼽힌다. 익명을 요구한 농업경제학자는 “잎담배는 다른 농산품과 달리 소비자들이 비싸도 국산을 선호하는 ‘국산 프리미엄’ 효과가 거의 없다"며 "저장성도 좋아 저렴한 외국산을 수입하는 게 이점이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국산 잎담배 가격은 인도, 브라질, 탄자니아 등지에서 생산된 잎담배의 세 배 정도라는 게 담배업계의 설명이다. 담배 회사 중 유일하게 국산 잎담배를 쓰는 KT&G가 전체 잎담배 중 국산 사용 비율을 2001년 75%에서 2013년 37%까지 줄인 것도 이런 비용 부담과 무관치 않다.

물론 담배 회사가 원가 논리만 기준 삼아 구입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오랜 기간 공생한 농가와의 관계나 사회적 책임을 다하라는 여론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KT&G 측은 “외국산보다 비싼 것은 분명하지만, 농가 보호 등 사회적 책임 차원에서 구매를 이어오고 있다”며 “앞으로도 국내 잎담배 산업이 유지될 수 있도록 꾸준히 지원해 나갈 것”이라고 설명했다. 미국계 담배 회사인 필립모리스도 몇 년 전 국산 담뱃잎을 구입하겠다고 밝힌 적이 있지만, 구입 물량이 너무 적다는 이유로 엽연초생산협동조합 중앙회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민간기업의 선의에 의존해야 하는 잎담배 농가 입장에선 불안감을 완전히 지우기 어렵다. 흡연을 죄악시하는 분위기가 커지고 있고, 정부가 고강도 금연 정책을 펴는 탓에 정책적 지원을 기대하기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돌파구를 찾으려는 시도도 있었다. 이낙연 의원은 2014년 국산 잎담배 사용 비중을 늘리자는 취지에서 담배 포장지에 원료 원산지를 의무 표기하도록 하는 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원산지가 국산이면 소비자들이 더 선호할 것이란 기대가 깔린 법안이었다. 하지만 국산은 건강에 나쁘지 않다는 오해를 심어줄 수 있고 국산 사용을 늘리는 효과도 미미할 것이란 관계 부처 반대에 부딪혀 법안은 2016년 폐기됐다.

그럼에도 농심(農心)은 쉽게 비관하지 않는다. 신운섭씨는 "미래에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평생 해온 농사라, 힘이 남아 있는 한 계속할 것”이라며 “서울에 사는 20대 아들도 원한다면 권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성택 기자 highnoon@hankookilbo.com
원 출처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0072217130002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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